기사제목 [북한돋보기] “그래도 정(情) 때문에...”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북한돋보기] “그래도 정(情) 때문에...”

칼럼
기사입력 2016.07.05 11: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허경은.jpg▲ 허경은 편집부장
북한사회에서 여행이란...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맞아 주변 사람들은 서로의 휴가 계획을 묻기 바빠졌다. 해외로 떠날 사람들은 이미 항공 예약을 마쳤고, 국내에서는 산과 바다 사이를 달리는 관광열차가 인기 관광 상품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행의 자유가 없는 북한의 여름 휴가철 분위기는 어떨까.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북한에도 여행을 떠나는 주민들이 많다. 그러나 그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한주민들이 쓰는 ‘여행’의 의미가 우리와 조금 다르다는 걸 먼저 이해해야 한다.

양정사업소(곡식을 가공하고 저장하는 곳)에서 근무했던 한 탈북자는 쌀을 가지러 다른 지방에 가는 것을 '여행 간다'고 표현했다. 장사를 하기 위해 먼 곳에 가서 물건을 받아 열차로 돌아오곤 했다던 탈북자도 여행길이 고되고 힘들었다고 했다. 따라서 북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출장이나 생계를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일'이란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다. 

웃돈 챙기기 쉬운 열차판매원 

twi001t982991.jpg아무리 회사에서 보내는 출장이라고 해도 북한에서는 열차표 사기부터가 쉽지 않다. 열차표를 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여행 또는 출장 증명서를 발급 받아와 제시해야 한다. 출장 증명서는 그나마 쉽지만, 여행 증명서는 다른 지역에 사는 가족의 사망이나 결혼 등 가정의 애경사(哀慶事)가 있지 않고서는 받기가 쉽지 않다.
 
북에서 열차판매원으로 근무했던 탈북자 김미란(가명)씨는 그럼에도 돈이면 안 될 것도 없다고 했다.   

“열차표를 살 때 공민증(주민등록증)과 증명서를 모두 제시해야 하는데, 증명서를 떼 온 사람들보다 열차 좌석 수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미 이전 역에서 좌석을 채워서 오니 중간 역에서 타는 사람들은 더욱 표 구하기가 어려워지죠. 그럼 표 판매원들에게 뇌물이 들어옵니다. 먹고살기 힘든 사회이니 좀 더 쥐어주는 사람에게 표를 팔게 되는 것이죠.”

열차판매원인 여자들이 총각들에게 인기가 좋은 이유는 잘 사귀어놓으면 큰 뇌물 없이도 표를 구하기 쉽기 때문이란 게 그의 설명이었다. 

장마당 시대에 급증한 열차 이용객 

탈북자들의 말에 의하면 기아에 허덕이던 고난의 행군 시대에 오히려 열차 이용객이 늘어났다고 한다. 뇌물까지 얹어 차표를 살 돈이면 먹을 걸 사는 데 쓸 것 같지만, 사람들이 직접 돈을 벌 방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장마당이 커졌기 때문이란 것이다.

간혹 우리 지역의 특산물을 다른 지역에 가져다 팔거나 그 반대로 물건을 싸게 들여오기라도 해야 할 지경이 되면 먼 거리를 오가며 무거운 짐을 날라야 했다. 

미란씨도 나중에는 장사 전선에 뛰어들어 옷가지들을 다른 지역에 가져가 팔았다고 했다. 역에서 근무한 덕분에 주변에 관련 일을 하는 동료들이 많아 비교적 쉽게 표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절엔 열차 이용객이 급증하면서 가끔은 문에 매달려 가기도 하고, 그 때 허리춤에 찬 돈 가방을 소매치기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여행길 차 안에서 싹튼 정

연료가 부족한데다 고장이 잦아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북한의 열차는 사흘이면 갈 수 있는 곳을 보름동안 달려 도착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걱정돼 발을 동동거리는 아이 엄마들, 먹을 게 떨어져 기력을 잃고 쓰러지는(심지어 숨지는) 객실 승객들, 멈춰선 기차로 다가와 창문 너머에서 간식거리를 파는 장사꾼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먼 거리 장사 길에 오른 사람들은 애초에 '도중식사'(도시락의 북한말)를 준비해가지만 열차가 멈추기를 반복해 열흘이 넘게 기차 안에 머무르는 경우도 흔하다. 그 때엔 물건을 팔아 번 돈을 간식 구입 비용으로 쓸 수 밖에 없다.

“한번은 군인 복장의 젊은이 네 명이 기차 안에서 쓰러졌어요. 제대하고 귀향하는 길인 것 같았는데 도중식사를 챙기지 못한 채 기차에 오른 거였죠. 평소 군인들이 민가에 내려와 물건을 자주 훔쳐가기 때문에 미운 감정도 있기는 하지만, 내 아들딸 같은 애들이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자기 먹을 것들을 조금씩 떼서 그 아이들 입에 넣어주고, 나중에는 그마저도 떨어져서 돈을 꺼내 간식을 사서 그 애들에게 먹였죠. 그 때 제가 번 돈의 절반은 군인 넷을 살리는데 썼습니다.”

미란씨가 살린 군인 중 하나는 꼭 보답하고 싶다며 주소를 받아갔는데 며칠 만에 먹을걸 싸들고 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미란씨는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뭉클했다”고 그 순간을 회상했다. 열흘 정도 기차 안에서 생사를 오가며 먹을 걸 나눠 먹은 정(情)때문에 가족과 다름없이 여겨졌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의 회상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민의 삶은 날로 피폐해지고 부패한 고위층은 배부른 특권을 향유하는 폐쇄사회에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정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것은 바로 여행의 자유마저 통제 받는 체제에도 개인과 개인 사이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공감은 면면히 살아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저작권자ⓒ코리안드림 & www.kdtimes.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정기구독신청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top